도전님께서는 1917(丁巳)년 11월 30일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方谷里)에서 탄강하셨다.
본관은 죽산 박씨로 존휘는 한경(漢慶)이시며,
자함은 경호(景浩)이고 존호는 우당(牛堂)이시다.
부친은 영선(永善)이시고 모친은 경주 김(金)씨로 원(瑗)이시다.
도전님께서 탄강하신 방곡리는 박달산(朴達山)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박달산은 북으로는 주월산(舟越山)이,
동서로는 신선봉(神仙峯)과 성불산(成佛山)이 자리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군자산(君子山)과 칠보산(七寶山)이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1917년은 도주님께서 감오득도하신 정사(丁巳)년으로,
도전님의 탄강일인 11월 30일은 11월과 30일(한 달)이 더해져
1년 12달의 도(道)를 상징한다.
교편생활을 하시다
도전님께서는 21세 되시던 해 교육에 뜻을 두고
진대사립학교(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소재)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셨다.
이곳에서 2년간(1937~1938) 학생들을 가르치신 후
괴산군 유하리에 자리한 신흥서당으로 옮겨 교편(1939~1940)을 잡으셨다.
당시 중일전쟁(1937)을 일으킨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국가총동원법’의 공포와 함께
우리말 교육을 금지하는 제3차 조선교육령(1938)을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사립학교인 신흥서당이 폐교(1941)되자
도전님께서는 만주 봉천으로 떠나셨다.
강제 징용과 우키시마호 사건
태평양전쟁(1941~1945)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조선인 강제 징용에 총력을 기울였다.
1944년 만주 봉천에서 돌아오신 도전님께서는 동생을 대신해 강제 징용을 떠나셨다.
부산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항을 거쳐 기차로 이송되어
혼슈[本州] 북단 아오모리[靑森] 가미키타[上北] 인근의 해군기지 노역장에 배치되셨다.
도전님께서는 일본 감독관의 부당한 대우로부터 조선인들을 보호하셨고,
고된 노역에 지친 조선인들을 위로하며 함께 힘든 징용의 삶을 이겨나가셨다.
1945(乙酉)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징용된 조선인들의 귀국이 결정되었다.
8월 22일 조선인들을 태워 부산을 향해 출항한 우키시마호[浮島丸]는
24일 정상 항로에서 이탈하여 교토[京都]부 마이즈루[舞鶴]만에서 폭발로 침몰하였다.
일제의 이 폭침으로 8천여 명의 조선인들 중 5천여 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도전님께서는 바다에 떠 있던 거북에게 의지하다가 구조되셨고
한 달 뒤에 괴산군 방곡리로 돌아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