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님께서는 함안 회문리에서 회룡재를 공부처로 정하셨다.
당시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여러 비상조치를 감행하며
전시통제체제를 강화하던 시기였다.
도주님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도수에 의한 공부를 계속하시며
회룡재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를 편력 수도하셨다.
해방 이후 도주님께서는 종교 활동을 부활하시고
부산에 도본부를 설치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공부에 진력하셨다.
도주님께서 회룡재에서 공부하실 때,
이용직은 한 다리가 불구인 몸으로
문경에서 회룡재를 왕래하며
도주님을 모시고 있었다.
어느 날, 도주님께서 이용직에게
“그대의 불구가 나의 공사를 돕는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회룡재(廻龍齋)
회룡재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회문마을에 위치하며
그 옆에는 도주님의 생가가 있다.
도주님께서는 1941(辛巳)년 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宗敎團體解散令)을 맞아
신도들에게 인덕 도수와 잠복 도수를 말씀하신 후
이곳으로 오셔서 도수에 따른 공부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