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명을 받들어 봉천으로 가시다
  • 봉천명으로
    50년 공부를 시작하시다


    “도주께서 기유년(15세시) 4월 28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봉천)에 가셨도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기 1년 전인 1909(己酉)년 4월 28일, 도주님 일가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만주 봉천으로 망명길에 오르셨다. 당시 15세이시던 도주님께서 신의주행 기차를 타고 만주로 향하실 때, 상제님께서는 몇몇 종도들과 대전역 부근에서 그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시며 “남아 15세이면 호패를 찬다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 라고 말씀하셨다. 이 공사와 함께 도주님의 50년 공부가 시작되었으니, 15진주(眞主)로서 상제님의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드신 ‘봉천명(奉天命)’이었다.
  • 만주에서의 구국운동

    만주의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으로 망명하신 도주님 일가는 이곳에서 황무지를 매입하여 농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하셨다.

    도주님께서는 어느 날 동지들과 독립운동의 방책을 의논하고 돌아오시던 중에 일본군 헌병대로 연행되셨다. 일본군이 독립운동의 혐의를 들어 총으로 위협하자, 당시 16세였던 도주님께서는 “사람마다 나라를 생각하는 것은 충이라. 너는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천신이 두렵지 않느냐.” 하시며 구국운동의 뜻을 당당히 밝히셨다.

    1911(辛亥)년에는 독립운동에 활약하시던 부친께서 청나라의 보황당원(保皇黨員) 혐의를 받고 북경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초를 당한 후 무혐의로 풀려나셨다. 이때 도주님께서는 부친께서 겪으시는 파란곡절에 가슴을 태우셨다.
  • 입산 공부를 하시다

    “엄친의 파란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
    교운 2장 5절

    20세기 초, 당시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주권을 상실한 채 반식민지 상태에 빠져 있었고, 일제는 대륙 침략의 야욕을 품고 이 쟁탈전에 뛰어들었기에 동아시아는 거대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전념하시던 도주님께서는 동양 천지에 닥친 약육강식의 소용돌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도력(道力)으로 구국제세(救國濟世)할 뜻을 정하시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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