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무극에서 태극으로, 부산에 도본부를 설치하시다
- 부산시 보수동에
도본부를 설치하시다
도주님께서는 1948(戊子)년 9월에 경상남도 부산시 보수동에
도본부를 설치하셨다. 부산의 보수산 아래에 위치한 보수동 도장은
2층의 목조 건물로 이루어졌으며 ‘보수도정(寶水道庭)’이라 불렸다.
도주님께서는 회룡재에서 보수동으로 옮기신 후
공부에 전념하시며 이곳을 중심으로 도를 펼치셨다.
1950(庚寅)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의 신도들이 부산으로
모여들면서 보수동 도장 일대에는 3,000여 세대에 이르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1956(丙申)년 도본부를 감천으로 옮기기 전까지
도의 모든 행사는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 마하사 49일 공부
1949(己丑)년 겨울 도주님께서는
동래 마하사의 방 한 간에서 정화수 24그릇을 받들고
49일을 한 도수로 공부하셨다.
49일이 거의 될 무렵 승려와 시종자에게
“법당의 불상을 자세히 보았느냐.”고 물으시기에
그들이 달려가 보니
불상이 머리를 숙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도주님께서 49일을 다 채우신 새벽에는 공부실 위로 학이 울며 날아갔고,
시종자에게 그동안 모아 놓은 글씨 종이를 태우고
그 재를 시냇물에 띄우게 하시니 시냇물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마하사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오신 도주님께서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 나가노라.”
고 말씀하셨다.
- 산정山亭을 공부처로
마련하시다
도주님께서는 도본부가 위치한 보수산 중턱에
공부처인 ‘산정(山亭)’을 마련하여 공부를 계속하셨다.
그 후 때때로
마하사, 만동묘, 해인사, 동학사, 쌍계사 등으로
다니며 공부하셨다.
1954(甲午)년 3월, 도주님께서 산정에 계실 때
대신동 산비탈의 판자촌에 큰불이 일어났다.
그 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보수동 도장을 향해 번져오자
신도들이 이를 도주님께 아뢰었다.
도주님께서 문을 열고 대신동 쪽을 바라보시자
거세던 바람이 누그러지더니 이내 불이 꺼졌다.
그해 봄 어느 날 도주님께서 산정에서의 공부를 멈추고 대청에 나오셔서
“앞으로 신도들의 동(動)이 두 번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도전님을 비롯한 몇몇 신도들이 도주님을 시좌(侍坐)하고 있었다.
- 만동묘에 행차하시다
1954(甲午)년 3월 도주님께서는 종도들과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의 만동묘에 가셨다.
만동묘는 상제님께서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하시며 청나라 광서제(光緖帝)에게 응기해 있던
황극신을 옮겨 봉안하신 곳이다.
도주님께서 만동묘 옛터를 살펴보고 돌아오실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는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나
화양구곡의 첨성대 아래 암벽 좌측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렸다.
석문 안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 황제 만력제(萬曆帝, 1563~1620)의 친필인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옥조빙호는 ‘옥과 같이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의미한다.
- 해인사에서 공부하시다
1954(甲午)년 가을 도주님께서는 종도들과 해인사를 방문하셔서
관음전 뒤편의 다로경권(茶爐經卷, 승려들이 차를 마시는 곳)에서
3일 동안 공부하셨다.
공부를 마치신 후 “사명당(四溟堂, 1544~1610)의 입적실에 가서
불공이나 드리고 가리라.”고 하셨다.
도전님과 세 사람이 먼저 그곳을 살펴보고 나서
가시기를 청하시니 “너희들이 다녀왔으면 되었다.”고 하시며
근처의 암자를 돌아보셨다.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날 도주님께서는 여러 종도들을
모아 놓고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바다에 있으므로 해인이요…
삼라만상의 근원이 수기를 흡수하여 생장하느니라.
하늘은 삼십 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
천상의 전기가 바닷물에 있었으니 바닷물의 전기로써
만물을 포장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 『태극도통감』을 발간하시다
1956(丙申)년 3월 도주님께서는 도전님으로 하여금
『태극도통감』을 편찬토록 하셨다.
『태극도통감』은 도주님의 말씀을
도전님께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도의 진리를 밝혀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태극도의 취지서, 종통과 강령,
기원, 신조(사강령ㆍ삼요체), 도주님 약력 등이 기록되어 있다.
『태극도통감』의 말미에는
‘도인대표 박경호(朴景浩, 도전님의 자함) 등
근초(謹抄)’라고 되어 있다.
- 동학사에서 공부하시다
1956(丙申)년 3월 도주님께서 충남 공주 계룡산의 동학사에 행차하셨다.
이때 도전님께서도 도주님의 분부를 좇아 류철규ㆍ박종순과 함께 이곳에 오셨다.
동학사 경내에는 신라ㆍ고려ㆍ조선의 3대 충의지사를
초혼(招魂, 죽은 사람의 혼을 부름)하여 모신 장소가 있다.
신라의 박제상을 모신 동계사와 고려의 포은ㆍ목은ㆍ야은을 모신 삼은각,
조선의 단종을 모신 숙모전, 생육신과 사육신의 신주(神主)를 모신
동무ㆍ서무 등이 바로 그곳이다.
동학사 경내를 두루 살펴보신 도주님께서는
염화실(拈花室)에서 7일간의 공부를 마치시고
“이번 공부는 신명 해원을 위주한 것이라.”
고 말씀하셨다.
- 쌍계사 영주각에서의 7일 공부
1956(丙申)년 8월 충청도 지방을 두루 다니며 교화에 힘쓰시던 도전님께서는
도주님의 분부를 받고 급히 도장으로 귀환하셨다.
도주님께서 지리산 쌍계사 행차에 배종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니,
다음날 도전님과 류철규, 한상덕, 김재복이
도주님을 모시고 쌍계사로 향했다.
도주님께서는 쌍계사 청학루의 뒤편에 있는
영주각(瀛洲閣)의 정결한 방에서 7일 동안 공부하셨다.
공부를 마치신 후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쉽게 마쳤다고 하시며
“趙鼎山來智異應 一布衣來白日寒”
(조정산래지리응 일포의래백일한)
이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