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계시로 귀국 후 창도의 기반을 마련하시다
  •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으시니 이때 도주께서 이국땅 만주 봉천에 계셨도다.
    교운 2장 8절

    상제님의 계시에 따라
    귀국하시다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대순진리에 감오득도하신 이후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상제님으로부터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으셨다.

    1917(丁巳)년 4월 도주님께서는 만주로 망명한 지 9년 만에 뱃길을 따라 조선으로 귀국하셨다.

    귀국 길에 폭풍을 만나 배가 충청남도 서산에 닿으니, 태안을 거쳐 안면도에 도착하신 후 이 섬의 정당리 느락골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여 공부를 이어가셨다.

    1918(戊午)년 가을에는 우일재에서 상제님께 치성을 드리고 “김제 원평에 가라”는 상제님의 명에 따라 종도들과 원평, 동곡 약방, 대원사를 순행하며 상제님의 발자취를 좇으셨다.
  • 후천 오만 년의 도수를 펼쳐
    도의 길을 열어주시다


    “개벽 후 후천 오만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시구.”

    도주님께서는 안면도에 1년 정도 머무신 후, 1918(戊午)년 9월 동곡 약방을 둘러보셨고 10월에는 상제님께서 49일 공부로 천지대도를 여신 대원사를 순행하셨다. 이곳에서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후천 오만 년의 도수를 펴서 득도의 길을 열어주리라고 말씀하셨다.
  • 원평 황새마을에
    포덕의 기반을 마련하시다


    “김제 원평에 가라.”

    1918(戊午)년 9월, 상제님의 명에 따라 김제 원평으로 오신 도주님께서는 동곡 약방에까지 이르셨으니 이 길은 상제님께서 9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밟으신 것이다. 10월에 대원사를 순행하시고 이정률에게 원평 황새마을에 거처를 마련케 하셨다. 이듬해 정읍 마동에서 상제님의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으로부터 봉서를 받으시고 2월에 황새마을로 가서 상제님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계속해서 공부하시며 포교에 힘쓰셨다. 이때부터 포덕이 활발하게 일어나 무극도 창도 당시에는 신도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황새마을은 도주님께서 1925(乙丑)년 4월 무극도를 창도하기 전까지 포덕 활동의 중심지였다.
  • 통사동 재실에서
    공부에 전념하시다


    “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今不聞古不聞之道也)라 믿고 닦기가 어려우니라.”

    도주님께서는 봉서를 받으신 직후인 1919년부터 1927년까지 통사동 재실에서 도수에 의한 공부를 하셨다. 이곳은 1876년에 세워진 전의 이씨(全義李氏) 문중의 재실로 황새마을 인근에 위치해 있다.

    통사동 재실에서 행하신 공부로는
    둔궤를 모시고 행한 공부(1919-1920)를 비롯해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정성을 드린 공부(1921),
    숫가지를 사용해 주(籌)를 놓는 공부(1927) 등이 있다.

    이러한 공부가 행해진 통사동 재실은 도주님께서 1919년에 해원상생 대도의 진리를 설법하며 도(道)를 밝혀주신 곳이기도 하다.

    통사동 재실(通士洞齋室)
    통사동 재실은 무극도 창도 전후에 도주님께서 주로 공부하셨던 장소로 전북 정읍시 감곡면 통석리에 위치하며 원래 전의 이씨(全義李氏) 문중의 재실로 사용되었던 곳이었다. 도주님께서는 이곳으로 1919년 둔궤를 찾아 옮겨오시고 1921년 동곡의 장탯날에 초빈된 상제님의 성골을 모셨으며, 1927년 9월부터 석 달 동안 이곳에서 주(籌)를 놓는 공부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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