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님께서는 1909(己酉)년부터 1941(辛巳)년까지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교에 힘을 다하시니 각지에서 신도의 무리가 일어났다.
그러나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종교단체 해산령을 내리니
도주님께서는 전국 각지의 종도들을 모으고 인덕 도수와 잠복 도수를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고 이르셨다.
그 후 도주님께서는 전국 각지에서 도수에 따른 공부를 하신 후
고향인 함안 회문리로 가셨다.
회룡재 공부
도주님께서는 함안 회문리에서 회룡재를 공부처로 정하셨다.
당시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여러 비상조치를 감행하며
전시통제체제를 강화하던 시기였다.
도주님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도수에 의한 공부를 계속하시며
회룡재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를 편력 수도하셨다.
해방 이후 도주님께서는 종교 활동을 부활하시고
부산에 도본부를 설치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공부에 진력하셨다.
도주님께서 회룡재에서 공부하실 때,
이용직은 한 다리가 불구인 몸으로
문경에서 회룡재를 왕래하며
도주님을 모시고 있었다.
어느 날, 도주님께서 이용직에게
“그대의 불구가 나의 공사를 돕는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회룡재(廻龍齋)
회룡재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회문마을에 위치하며
그 옆에는 도주님의 생가가 있다.
도주님께서는 1941(辛巳)년 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宗敎團體解散令)을 맞아
신도들에게 인덕 도수와 잠복 도수를 말씀하신 후
이곳으로 오셔서 도수에 따른 공부를 하셨다.
종교 활동을 부활하시다
1945(乙酉)년 7월 4일 이용직이 회룡재를 떠나려 하자
도주님께서는 며칠 더 묵어가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이틀 뒤 이용직은 도주님으로부터
“오늘 무슨 큰일이 일어나고 도수가 바꿔지리라.”
는 말씀을 듣고 회문리를 떠났다.
7월 8일(양력 8월 15일) 일본은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와 함께 도주님께서 종교 활동을 부활하시자
전국 각지에 흩어졌던 도인들이 회룡재로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