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님께서 무극도를 창도하신 후 포교에 힘을 다하시니
믿고 따르는 신도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도주님께서는 신도들에게 해원상생 대도의 진리를 밝혀주시고,
정해진 도수에 따른 공부를 이어나가셨다.
1925(乙丑)년 봄, 부안 변산에 가셔서 육정(六丁)신장을 불러 응기케 하셨고,
1926(丙寅)년에는 담뱃대 도수를 보시는 한편
태인과 서울 도렴동을 왕래하며 공부하셨다.
이와 함께 안면도와 원산도에서 토지를 해원하고
창생을 구제하는 사업을 시작하셨다.
부안 변산에서 공부하시다
(1925년) 봄 어느 날에
도주께서 부안 변산(邊山)에 가셔서
육정(六丁)신장을 불러 응기케 하시니
뇌성벽력이 크게 일고
산천이 진동하는 듯하였도다.
담뱃대 도수
1926(丙寅)년 봄, 공부를 마치신 도주님께서
크고 작은 태극을 그린 담뱃대의 담배통과 물부리를
여러 개 만들어서 종도들에게 등급별로 나눠 주셨다.
일반 신도들에게는 제각기 설대에 태극을 그려 넣게 하셨는데
이를 ‘담뱃대 도수’라고 말씀하셨다.
담뱃대
담뱃대는 담배통과 설대, 물부리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담배통은 담뱃잎을 담아 불을 피우는 부분이고
물부리는 입에 물어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곳이며
설대는 담배통과 물부리를 연결하는 부위이다.
설대가 긴 담뱃대를 장죽이라 하고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은 곰방대라고 부른다.
주籌를 놓는 공부
1927(丁卯)년 9월,
태인에 계시던 도주님께서는 배문걸을 데리고 통사동 재실에 가셔서
석 달 동안 주(籌)를 놓는 공부를 보시고 이후로도 계속 이어가셨다.
주의 판은 오동목으로, 숫가지는 대나무 조각으로 하셨다.
숫가지 놓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숫가지를 이리저리로 옮기실 때마다 불빛이 번쩍였다.
주(籌)
산학(算學)의 기본적인 계산법으로
산가지(일명 숫가지)를 놓아서 셈을 하던 방식을 말한다.
주에 쓰던 산가지는 대나무나 금속, 상아 등을
젓가락처럼 만들어서 사용하였는데,
이 산가지로 수를 나타낼 때 혼동하지 않도록
가로세로로 벌여 놓고 셈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계산법이 조선 말까지 사용되었다.
토지 해원과 제민사업
도주님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창생을 구제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셨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을 창설하시고
안면도와 원산도 두 섬의 간석지(갯벌) 개척을 시작하셨다.
안면도로 공부 장소를 옮기신 도주님께서는
창기리의 재실 홍일우(洪一宇)에서 도수에 따른 공부를 하시며 제민사업을 도우셨다.
이 사업으로 생활이 어려웠던 많은 민생이 구제되었다.
구제창생을 위한 제민사업은 종단이 추진하는 3대 중요사업의 기틀이 되었다.
진업단(進業團)
1925(乙丑)년 봄, 도주님께서는 가난한 생민과 신도들의 생업을 장려하여
안심(安心)ㆍ안신(安身)케 하기 위해 진업단을 창설하셨다.
무극도 신도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진업단은
개간사업, 수리사업, 안면도와 원산도의
간석지(갯벌)를 개척하는 사업을 수행하였다.
특히 안면도와 원산도의 간척사업은 방조제를 쌓아 농지를 만들었는데
현재 안면도의 참새골방조제와 창기방조제,
원산도의 신촌방조제와 사창방조제가 바로 그곳이다.
이 개척사업에는 헌금 2만 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수확한
곡물 3백 석이 동원되었고 안면도에 20만 평의 농지가 개간되어
많은 곡물이 생산되었다.
또 원산도에는 수천 평의 염전도 만들어져 여러 마을 사람에게 자립의 활로를 열어주었다.